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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 존재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경세철학

행개련 0 1196

율곡의 존재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경세철학



백완기(행개련 고문, 고려대 명예교수)



I. 존재론적 세계관

율곡의 존재론적 세계관은 그의 철학적 입장인 主氣說에서 연유한다. 그는 일차적으로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보다는 생물학적 존재로 파악한다. 인간을 도덕적 또는 윤리적 존재로 인식할 때에 당위론이 펼쳐지지만 인간을 생물학적 존재로 파악할 때에 존재론이 펼쳐진다. 그는 인간의 본질을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려는 존재로 파악하였다.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로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려는 현상은 천리현상이며 기의 현상으로 인식하였다. 그의 모든 사상과 현실에 대한 처방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관으로부터 도출된다. 그가 만일 그 시대의 대부분의 학자들처럼 당위론적 세계관에 빠져 있었더라면 그의 사상과 처방은 한정성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우선 농촌의 황폐화로 인한 백성의 이농현상과 세상의 어지러움을 도덕적 처방 중심의 당위론적 시각에서 풀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는 농촌의 황폐화나 사회적 혼란을 도덕적 차원에서 풀려고 할 때에 결코 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경연석상에서 허엽(허봉, 허균, 허난설헌의 부친)과의 논쟁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당시 선조를 모시고 여러 대신들 이 경연석상에서 농촌의 황폐화를 막는 데 여러 가지 의견들을 개진한다. 이때 허엽은 향약중심으로 도덕적 처방을 들고 나온다. 율곡은 여기에 맞서서 양민정책을 들고 나온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윤리나 도덕은 소귀에 경 읽기라는 것이다. 허엽의 처방책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논박하여버린다. 율곡이 들고 나온 대책은 양민정책으로 우선 백성이 먹고 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존재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그의 경세철학을 살펴보기로 한다.

II. 양민정책

국가의 안녕을 백성의 생존적 편안함에서 구한다. 양민이라는 것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백성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먹과 마시고 잠자고 입는 것이 풍족한 경제력이 갖추어진 백성을 키우는 것이다. 생존 조건이 넉넉할 때에 나라의 기틀이 다져진다는 것이다. 이른바 민본주의이다. 민본주의의 본질은 정치의 목적은 백성에서 출발해서 백성에서 끝난다는 것이 율곡의 입장이다. 백성을 키우고 길러야 하는 정책으로 산업을 일으키고 세금을 줄여주고, 부역을 균등하게 하는 것이다.

III. 힘의 문화

율곡은 윤리적, 도덕적 힘에 앞서 물리적 힘인 경제와 국방을 강조하였다. 그는 규범적이고 무형적인 가치보다 생존에 직결되는 유형적이고 물리적 가치를 우선시하였다. 그 역시 도덕적 가치를 소중히 여긴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기본적 입장은 도덕적이고 윤리적 가치는 생존에 직결되는 물리적 가치를 토대로 해서만 그 구축이 가능하고, 이렇게 다져진 도덕적 가치래야 본래의 모습을 지니면서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힘에 앞서 물리적 힘을 강조한 대표적 사람으로는 역사적으로는 세종대왕과 김육을 들 수 있고 근대에 와서는 안창호, 김성수, 박정희 등을 들 수 있다.

율곡의 힘의 문화는 經濟基底主義와 국방우선주의(무의 중요성 강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1) 경제기저주의

율곡사상의 특징적인 것의 하나가 바로 경제기저주의이다. 한마디로 모든 가치의 발현은 경제적 가치를 토대로 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율곡의 경제기저주의는 모든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면서 경제 가치는 다른 가치의 실현에 밑바탕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맑스의 경제결정론과는 다르다. 율곡은 경제적 가치가 모든 가치발현의 밑바탕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모든 가치를 결정하는 인자로까지는 보지 않았다.

율곡은 백성은 먹는 것에 의존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존하고 또 군대를 키우는 선결문제도 먹는 것을 튼튼히 하는 것이라고 하고, 백성의 교화문제도 먹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자리를 잡게 된다는 것이다.

율곡은 경제를 키우는 데 두 가지 방책을 내세웠다. 하나는 소극책으로 경비와 지출을 줄이는 근검절약을 꾀하는 것이었다. 즉 쓸데없는 관직을 줄이고, 지방행정관서를 통폐합함으로써 나라의 경비를 줄이자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적극적인 방책으로서 늘어만 가고 있던 황폐전을 다시 개간하여 생산증진을 꾀하자는 것이었다. 율곡의 생산장려책은 어디까지나 농업 위주의 정책이었다. 다른 분야인 상공업이나 임업, 어업, 과업, 염업 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율곡의 경제기저주의의 특징은 당시 윤리와 도덕으로 사회기강과 정치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할 때에 경제력을 토대로 바로잡으려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2) 국방우선주의

율곡은 문인이면서도 국방을 위한 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한 사람이었다. 율곡이 무나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단순히 앞으로 닥쳐올지도 모를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만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일차적으로 국방상 또는 전쟁에 대비해서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 이상의 뜻이 있었다. 율곡이 앞으로 닥쳐올지도 모를 임진왜란에 대비해서 십만 양성을 주장하였다고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율곡의 주장은 옳은 것이었다. 무는 국가의 생존을 다지는 데 절대 절명의 요소였다.

당시 문치주의가 지배하고 있어 무를 경시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러한 풍조는 율곡에게는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위험스러운 풍조였다. 국가의 기틀은 문과 무가 양축을 이룰 때에 굳게 다져진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그는 문신이었지만 당시 군정의 폐단을 낱낱이 고발하고 거기에 대한 강구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전술, 군사훈련, 병기의 보관방법, 군대편성, 군량미 비축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깊은 연구를 남기고 있다. 그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에도 조정에서는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적을 물리치는 방비책을 구한다. 이는 율곡만큼 군사전문가가 그 당시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율곡이 무를 중요시한 것은 당시 문약에 흐르고 있었던 사회상에 대한 경고도 내포하고 있었지만 무 자체의 동력성과 활력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군사력은 그만큼 사회를 활성화시키고 산업을 진흥시키고 사람들을 활기차게 하고 기술을 발달시키는 요인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오늘날 서양이나 일본이 그 문명을 이룩하는 데 기사도 정신이나 사무라이 정신이 크게 기여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IV. 실천적 실용주의

율곡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實 중심의 사상이다. 그의 저서를 펼치면 實자를 붙인 어휘가 여러 가지 형태로 수없이 나온다. 예컨대 實踐, 實用, 實理, 實學,實刑, 實心, 實施, 實效, 實功, 實事, 實德, 實强 등이다. 여기서 나온 철학이 형식, 격식, 허례 또는 명분을 배격하는 실천적 실용주의이다. 그는 사물을 접근하는 데에도 본질적이고 본체론적 입장에서 접근하였지 형식과 명분의 입장에서 접근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본질을 탐색하는 데 있어서도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생물학적 존재로 보았지 규범적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인간은 생리적 물리적 자연기능으로서의 존재였지 당위론적 존재가 아니었다. 이러한 사상은 사생활이나 공직생활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는 제자들과의 강론 중에도 남녀 간의 성문제를 진지하게 토론하고 같이 고민도 한다. 이러한 사제 간의 담론과 상담은 당시의 선비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대를 잇는 적자소생이 없었다. 그러나 양자를 들이지 않고 측실소생으로 자기의 대를 잇게 한다. 당시 명분과 격식과 적통을 생명보다 소중히 여겼던 양반사회에서는 역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율곡에게는 비록 서자이지만 자기의 핏줄로 대를 잇는 것이 본질과 자연의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다. 선조가 자기의 생부의 제사에 참여하려고 할 때에 당시 신하들은 명분을 내세워 반대하였다. 즉 임금은 私情에 의해서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곡은 어떠한 명분이나 격식도 아무리 임금이지만 그를 낳아준 어버이에 대한 효와 혈육 간의 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실천과 행동을 유난히 강조함으로써 행동주의 철학을 내세워 인간의 기동성, 적극성, 의지성, 시도성을 강조하고 있다.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인간의 의지성을 강조한다. 잘살고 못사는 것은 인간의지에 달려 있지 그밖의 요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상의 음덕이나 운명주의 따위를 거부하고 있다. 율곡은 인간에게 모든 결과의 책임을 귀속시킴으로써 인간결정론, 인간주체론, 인간책임론 등을 제창하고 있다.

둘째, 학문과 실천의 상호교환성이다. 우선 학문의 실천성 문제이다. 그는 선비의 기본자세는 숨어서 글이나 읽는 것이 아니고 배운 것을 기초로 해서 선을 천하의 사람들과 같이 나누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선비의 겸선(밖에 나와서 어진 정치를 하여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본래의 뜻이고 물러나서 글이나 읽는 自守가 본래의 뜻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율곡은 퇴계에게 비판적 자세를 취한다. 율곡의 중요한 지적은 학문이나 이론은 실천 속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학문이나 이론이 있고 다음에 실천이 뒤따르기도 하지만 실생활과 실천 속에서 사상과 이론이 나오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와 입장은 신라시대의 원효에서도 뚜렷하게 발견된다. 이러한 실생활 속에서 이론을 색출하는 자세는 바로 미국의 실용주의 사상이다. 미국의 학문이 항시 현실적합성을 갖는 것은 현실 속에서 이론을 도출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과 학문적 자세는 대륙의 관념론적 자세와 대비된다.

셋째, 율곡은 정책이나 계획수립보다 그 집행에 역점을 두고 있다. 계획이나 정책의 열매는 집행을 통해서 맺어지기 때문에 집행에 역점을 두었다. 이것은 오늘의 행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넷째, 개혁이나 변화의 점진주의이다. 그는 존재론적 시각에서 현실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과격한 개혁보다 점진적 개혁을 선호하였다. 점진적 개혁은 현실의 존재성을 유지하면서 진행되기 때문에 큰 저항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광조가 추진한 도학정치는 너무나 과격하고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조광조 일파는 당위론자들이었기 때문에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을 과격하게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율곡은 한 가지 한 가지 실천의 축적 속에서 개혁이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율곡은 과격한 개혁이 앉아서 자리나 지키는 무사안일주의보다 낫다고 지적하고 있다.

VI. 정치질서의 객관화

율곡은 사물을 판단하고 계책을 새우고 시론을 펴는 데 철저하게 사실에 의존하고 있지, 공허한 이념이나 명분 또는 규범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그는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도 비정하리만큼 사실에 입각하고 있다. 그의 [석담일기]를 보면 그의 붓끝에 안 녹은 사람이 없다. 그를 나라에 천거하고 후원자 노릇을 한 선배사류나 원로대신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이준경과 백인걸의 예). 그는 경연석상에서도 쉬지 않고 선조의 나약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사실을 존중하고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평가하였기 때문에 적도 많았다. 따라서 선조의 노여움도 사고 이웃의 원한도 많이 샀다. 어떤 사학자는 율곡이 오래 살았으면 필히 조광조의 운명처럼 되었으리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면 정치질서의 객관화를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기로 한다.

(1) 정치과정의 개방화

그는 정치의 공개성을 주장하고 공개성을 통해서 정치질서는 객관화되고 바로 선다고 믿었다. 여기서 정치의 최고책임자인 군왕이 몇 사람의 총신에 의해서 귀가 막히고 눈이 가려지는 것을 심히 걱정하였다. 정치의 객관성과 공개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임금 자신이 자기의 총명만을 믿는 것도 경계하였다. 그는 君道를 논하면서 군왕이 暴君이나 昏君 또는 庸君에 떨어지게 되면 정치의 공개화는 일어나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폭군은 욕심이 많고 백성을 착취하면서 자기가 성인인 체하는 자이고, 혼군은 잘 다스리겠다는 의지는 있으나 간악한 사람과 어진 사람을 가려낼 능력이 없어 결국 간악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자이고, 용군은 우유부단함으로써 구태에 머무름으로써 미봉책만을 일삼는 사람이다. 임금은 현신과 간신을 구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선조는 어떻게 하면 현신을 찾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에 율곡은 "전하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보다 자기의 맡은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을 등용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선조는 이에 불쾌감과 의심을 갖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로서는 임금에 충성을 다짐하는 것이 신하로서 최고의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율곡은 선조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전하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배신할 가능성이 있지만, 자기의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결코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 충언한다. 여기서 율곡은 철저하게 직업윤리를 내세우게 된다. 쉽게 말해서 직업윤리가 철저한 인물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언로의 확장

임금은 항시 신하들과 접촉을 하면서 의견을 나누고 사람됨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선 신하들과의 소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언로의 확장이란 관직에 있는 벼슬아치나 선비계급은 물론 서민들도 임금에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율곡이 주장하는 언로의 확장이란 좋은 의견을 모으자는 뜻도 있었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임금이 간신이나 소인에 둘러싸여 인의 장막이 쳐지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그는 언로가 트이면 간신 중심의 밀폐정치는 일어날 수 없다고 믿었다.

이러한 언로의 확장은 율곡이 주장하는 공론정치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공론은 어디까지나 사림 중심의 여론을 이야기한다. 즉 사림이 공론의 주체이다. 공론이 확산되면 공정성, 일반성, 중용성이 저절로 다져진다는 것이다.

(3) 권력의 견제

율곡은 아무리 높은 군왕이라 할지라도 그의 권력은 견제되고 제약되어야만 정도에 입각한 정치질서가 확립될 수 있다고 믿었다. 권력이 견제되지 않을 때에 권력은 폭력화되고 그러한 권력을 행사하는 군왕은 폭군이 된다고 믿었다. 세종은 그의 권력이 견제되었기 때문에 성군이 되었고, 연산군은 권력이 견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폭군이 되었다. 그는 임금의 권력 견제를 임금의 바른 마음자리에서부터 찾으려고 하였다. 마음자리가 바르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도 헛수고라는 것이 율곡의 생각이었다. 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지배계급의 솔선수범이다. 왕을 비롯해서 지배계급이 솔선수범을 보일 때에 권력은 순화되고 사회기강은 자연스럽게 잡힌다고 확신하였다. 임금을 위시해서 조정과 백관이 바르지 못한 상태에서 만민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근본을 버리고 말단만 다스리는 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영국의 상류사회에서 생활화된 '노블리스 오블리주'이다.

VI. 행정의 합리화

(1) 공정한 인사행정의 확립

문무를 가리지 않고 충원부터 승진 전보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능력과 성취 및 적성 위주로 하자는 것이다. 이 당시 문벌주의가 성행하여 다같이 등과를 해도 권문세가의 자제들만 크게 등용되는 폐단이 심하였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문벌이 약하면 그 재능을 펴볼 기회가 없었다. 특히 관리의 전형은 청탁이나 정실로 이루어져 기껏해야 한두 명의 인재를 안배하여 공의와 명분을 가장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출신성분을 따지지 말고 능력 위주의 인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2)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吏道의 쇄신

율곡은 무사안일주의 작태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고관은 녹만을 지키고 나랏일에는 뜻이 없으며, 낮은 벼슬아치는 먹기만 하고 공무에 이바지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관청의 일을 애써 하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뭇사람들이 비웃고 욕하면서 못난 자로 취급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상하를 막론하고 관료들은 몸을 도사리고 눈치를 살피면서 벼슬살이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풍조는 높은 벼슬아치들일수록 심하였다(정유길의 예). 율곡은 지방 관료들의 횡포와 수탈은 도를 지나쳐 백성들이 견디기가 어려웠다고 지적하고 있다. 율곡은 관료사회의 비리와 무능 및 무사안일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지만 과격한 숙청이나 처방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3) 행정의 안정과 전문화 추구

행정이 안정을 되찾지 못하고 무질서와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은 관리의 임명, 퇴임, 자리바꿈이 조석으로 달라질 정도로 자주 일어나게 되는 데 연유한다는 것이다. 극단의 경우는 임지에 가기도 전에 자리가 바뀌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자리를 제수받아 그 업무를 파악하기도 전에 다른 자리로 바뀌어 버리면 혼란이 야기되고 행정의 안정은 물론 전문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찰사의 경우도 임기가 2년인데 너무 짧다는 것이다. 적절한 인물을 선택하였으면 가족까지 동반케 하여 오랫동안 그 직을 담당케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하급수령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4) 직업전문주의의 강조

율곡은 전술한 대로 사람에 대한 충성보다 맡은 일에 대한 충성을 다짐함으로써 직업전문주의에 입각한 직업윤리를 강조한다. 은혜와 녹만을 중심으로 임금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임금을 배반할 가능성이 있지만, 자기의 맡은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임금을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 사회에도 적실성이 있는 주장이다. 율곡 당시로서는 충성하면 주로 사람에 대한 충성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에 반해서 일에 대한 충성을 들고나온 율곡의 주장은 신선하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서구사회에서 보편화된 직업윤리는 직업전문주의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일에 대한 충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5) 지방서리에게 급료 지급

율곡 당시 지방서리계급들의 갖은 농간과 토색질은 보편화된 현상이었다. 지방서리 역시 지방행정기관으로 엄연히 공직자였는데 일만 시키고 급료를 지급하지 않았다. 즉 일의 대가인 생활비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은 것으로 토색질을 적당히 하면서 살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들은 나라에서 주는 녹이 없어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방법으로 토색질을 일삼았다.

(6) 지방행정구역의 통폐합

백성의 수에 비해서 관직의 수가 많으면 그 부담은 결국 백성으로 돌아가니 적고 미미한 구역은 통합해서 수령의 수를 줄이자는 것이다.

(7) 經濟司의 설치

율곡이 주장하는 경제사는 오늘의 행정에서 '애드호크라시' 같은 조직이다. 율곡의 설명에 의하면 경제사는 어떤 특정부서에 소속시킬 것이 아니라 당시의 총괄기관이었던 의정에 소속시켜 시무에 밝고 국사에 유의하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그들로 하여금 중요한 사항을 토론하고 합의케 하여 국왕에게 건의하여 제반 개혁을 추진하자는 것이다. 그 당시 육조라는 행정의 분장기관이 있었지만 한 부서 이상에서 처리되어야 할 사항들이 있었고, 또 국가의 중요사항에 대해서는 여러 부서 사람들이 모여 보다 종합적인 관점에 다루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다.

VII. 맺는말

율곡은 규범과 이상에 앞서 실존과 현실을 강조하였다. 나라의 튼튼한 바탕을 백성의 양육에서 찾았지, 도학의 실천에서 찾지 않았다. 현실 속에서 문제를 풀면서 이론을 탐색하였지, 기존의 이론으로 현실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실천과 경험을 이론보다 중요시하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형식과 명분보다 내용과 실용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고 실존의 연속을 위해서 과격한 변화보다 점진적 개혁을 선호하게 된다. 그의 사상은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적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한국정책학회 2011년 하계학술대회 및 국제학술대회 발제문(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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